제3장
시련과 위기를 맞아 경영정상화를 모색하다 (1997~2008)-
1997년 대한펄프는 회사의 경영철학과 업 정체성은 물론 토종기업에 걸맞은 브랜드인 ‘깨끗한나라’를 론칭했다. 수많은 소비자 조사를 거쳐 탄생한 ‘깨끗한나라’는 깨끗함을 상징하는 순수 한글 브랜드로 화장지 카테고리를 대표했다. 이와 함께 그해 시설투자에 나서 화장지와 생리대, 기저귀 설비를 각각 준공했으며, 1999년에는 제지 3호기를 준공했다. 특히 2,000억 원이 투입된 제지 3호기는 하루 500톤의 생산능력을 갖춘 최첨단의 자동화 설비로 이는 세계 최고의 규모였다.
그러나 대단위 투자가 발목을 잡았다. 국가의 총체적 위기상황인 IMF 외환위기가 발발하면서 금리가 폭등하고 자금 압박이 거셌다. 경기침체에 따른 수요 급락과 업계의 시설과잉에 따른 수급불균형으로 어려움은 더욱 가중됐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품 개발에 전력을 다해 국내 최초로 ‘매직스 팬티라이너’를 개발하고 성인용 기저귀 사업도 본격화했다. 또 ‘매직스’, ‘깨끗한나라’, ‘보솜이’ 등 제품별 브랜드를 정비하고 소비자의 니즈와 고급화 추세에 부응하는 프리미엄급 제품을 잇달아 출시했다. 자금 부족으로 설비의 증설이나 사업 확대를 꾀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그 대안으로 마케팅력을 발휘하며 판매 촉진을 도모했다. 디자인 공모전, 매직스 광고모델 선발대회 등을 개최하고 기존의 관행을 뒤엎는 파격적이고 참신한 TV 광고로 소비자를 사로잡는 등 마케팅에 총력을 기울여 시장점유율을 높여갔다.
수출 확대에도 나섰다. 세계 공장화가 진행되는 중국시장에서 북경사무소와 광저우사무소를 중심으로 현지 공략에 나섰으며 일본, 미국, 호주 등 기존 시장 외에도 서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로 수출선을 다변화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2000년에는 은탑산업훈장 및 1억불 수출탑의 기쁨도 안았다.
어려운 와중에도 깨끗한나라 만들기 캠페인, 종이컵 수거 및 재활용 캠페인 등 친환경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으며, 폐기물과 폐수처리를 친환경공법으로 처리해 환경친화기업에 지정된 데 이어 환경경영대상을 수상했다. 업계 최초로 ISO 9001과 ISO 14001을 획득하여 품질 · 환경 통합경영체제를 구축하고 FSC 산림인증 획득 및 시범사업에 참여하는 등 책임 있는 경영을 이어갔다.
그러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최병민 회장과 대한펄프 전 임직원이 뼈를 깎은 고통 속에서 정리 가능한 자산을 매각하고 사업 및 인적구조조정을 단행하는 등 재무구조 개선에 온 힘을 다했다. 소비자의 니즈에 부합하는 제품 출시와 품질 및 생산성 향상에 전사적으로 나섰으며, 소비자 만족을 통한 판매 촉진에도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자구적인 노력만으로는 역부족이었고, 그 과정에서 최병민 회장이 건강을 크게 해치면서 회사의 존립이 위협받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결국 희성전자의 도움을 받으며 비로소 위기에서 벗어나 경영정상화를 도모하기에 이르렀다.40. 위기와 시련에 맞서 경영정상화 모색
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촉발된 위기 맞아
대한펄프는 1997년 ‘깨끗한나라’ 브랜드 론칭을 계기로 생활용품사업의 안정적인 성장을 구가하며 성장가도를 달렸다. 1990년대 중반까지 2,000억 원이었던 매출은 1998년 3,000억 원대를 돌파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도 200억 원대에서 350억 원으로 늘어나 12%의 이익률을 유지했다. 2000년에는 매출 4,000억 원, 영업이익 400억 원 고지를 넘어섰다. 제지부문이 전체 매출의 54%, 생활용품부문이 46%의 비중이었다.
그러나 승승장구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1997년 제지산업의 현대화를 위해 최신의 제지 설비를 도입하기로 결정한 그해 말 IMF 외환위기가 발발하면서 시련은 시작됐다. 1997년 12월부터 1998년 1월 사이에 도산한 기업은 3,000여 개가 넘었는데, 그 중에는 대기업은 물론 최고로 안전하다는 은행권도 대거 포함됐다. IMF 체제에서 시중은행의 평균 금리는 무려 연 29.5%였다. 금융시장의 위축과 환율 및 원자재값 상승 등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한 개의 기업이 자구책을 마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원화 환율이 급등하는 바람에 막대한 환차손으로 자금사정은 날로 악화됐다. 산업은행의 저리 자금 운용계획이 차질을 빚으며 고비용 리스 운용으로 바뀌게 된 것이 위기의 시작이었다. 이미 해외기업에 설비를 발주한 상태였고, 공장 건축공사도 진행되고 있었다. 자금줄은 모두 막혔는데 지불해야 할 자금은 당초 계획했던 금액보다 몇 배로 뛰었다. 실제로 제지 3호기 증설에 1,500억 원을 투입할 예정이었으나 IMF 외환위기로 인해 환율이 변동되면서 2,000억 원으로 증가했다. 설상가상 경기침체로 수요가 줄어든 데다 제지업체들이 대거 설비 증설에 나선 탓에 가격경쟁마저 극심했다. 여기에 펄프가격 상승 등으로 원가부담이 가중되면서 수익성마저 크게 약화됐다. 후에 최병민 사장은 당시 자금 압박과 회사를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 및 중압감으로 인해 자고 일어나면 이부자리가 진땀으로 축축할 정도로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토로한 바 있다.
이러한 국가적 위기 속에서 많은 기업들이 외국기업과 합작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확보했지만 대한펄프는 토종기업으로서 스스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매일이 긴장의 연속이었고 어음을 어음으로 대체하는 형국이었다. 최병민 사장을 비롯한 재무 담당자들의 최우선 업무는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제지 3호기 증설 자금을 조달하고자 스위스에서 발행한 전환사채도 큰 도움이 됐다. 외환위기 이전만 해도 정부는 외화의 국내 반입을 금지했으나 외환보유액이 급감하자 이를 허용했는데, 이때 스위스에서 발행한 전환사채를 들여와 숨통이 트였던 것이다.
노사합심 위기극복 실천다짐대회유동성 확보와 경영합리화를 위한 사업 및 조직 정비
대한펄프는 IMF 외환위기가 닥치자 곧바로 긴축재정에 돌입했다. 이후 재무구조 개선 및 유동성 확보, 그리고 경영합리화를 위해 사업 및 기구를 지속적으로 정비해 나갔다. 먼저 1999년 3월 의정부공장의 가동을 중단하고 11월에 북경사무소를 폐쇄했다. 2001년에는 의정부공장 부지와 계열사인 무선통신용역업체 대한무선통신을 매각했다. 이어 2003년 9월 마산지점, 인전치점, 수원영업소를 폐쇄했으며, 홍콩사무소와 광저우사무소를 통폐합했다.
관리 및 원가 절감도 꾀해 원료 및 자재 운반, 물류포장 등 경쟁력 없는 분야는 과감히 아웃소싱했다. 이때 물류창고를 정리하고 대한통운에 아웃소싱을 해 물류비 절감과 업무효율을 제고했다. 의정부공장의 가동 중단으로 인력을 청주공장으로 배치하면서 관리직 위주의 인적 구조조정을 단행, 810명이었던 종업원을 550명으로 32% 감축했다. 오랫동안 함께 해온 직원들을 내보내는 아픔은 컸지만 지속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했다. 공장 원가절감을 위해 총무, 회계, 전산부서 등 핵심 지원부서를 청주공장으로 이전했으며, 원가절감 혁신활동을 위해 태스크포스팀을 꾸려 절감 목표액을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는 데 주력했다.
어려운 와중에도 직원들이 개선 제안이나 아이디어 등을 제공하면 심사를 거쳐 포상금을 주는 개선제안제도를 강화해 동기부여를 했고, 현장에서 제안한 내용은 곧바로 적용했다. 최병민 사장을 비롯해 대주주들이 세 차례에 걸친 유상증자를 통해 사재 360억 원을 출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자금 악화와 경기 침체에 따른 사업 부진 등으로 상황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제지 3호기 증설로 품질의 규격화 및 표준화 실현
대한펄프는 계속되는 어려움 속에서도 제지사업 부문에서 1999년 제지 3호기를 준공한 이후 생산을 늘려갔다. 제지 3호기에 투입된 자금은 약 2,000억 원으로, 당초 예상금액을 훨씬 웃도는 것이었다. IMF 외환위기로 인한 엄청난 금리 인상이 주 원인이었고, 이는 회사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제지 3호기는 위기를 극복하는 견인차이기도 했다. 제지 3호기는 당시 세계 최고의 성능과 생산능력을 갖춘 설비였다. 이 설비에서 생산한 제품은 품질이 우수했고 생산성도 높아 고객 만족도가 높았다. IMF 외환위기에 따른 경기침체와 수요 감소, 그리고 업계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제품의 품질에 대해서는 국내외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대한펄프는 국내시장의 어려움과 한계를 해외시장에서 만회하고자 수출을 확대해 나갔다. 특히 미국, 일본 등 선진국으로의 수출이 크게 확대되었는데 이는 제품의 품질이 그만큼 우수했다는 방증이었다.
이는 제지 3호기의 증설이 가져온 결실이었다. 즉 전자동화 설비로 생산성 확대는 물론 품질의 규격화 및 표준화를 실현하여 해외 선진업체와 벌이는 숨가쁜 레이스에서 해외 수출선의 까다로운 요구와 수출물량에 부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암웨이와의 협업, 대형할인점 입점 등 판로 확대
생활용품사업 부문에서는 판매망 확대 및 판로 개척을 통해 위기를 타개해 나갔다. 그 중에서도 암웨이와 사업 파트너로서 윈윈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 미국에 본사를 둔 생활용품업체 암웨이는 1989년 한국암웨이를 설립하며 국내에 진출한 이후 방문판매와 철저한 환불정책으로 급속도로 국내시장을 파고들었다. 암웨이는 1998년 국내의 많은 기업들이 외환위기의 영향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이들에게 판로를 제공하는 ‘원포원(One for one)’ 프로젝트를 수립했다. 암웨이의 제품과 국내기업의 제품을 자사의 판로를 활용해 판매하는 상생전략의 하나로, 이들이 주목한 것은 품질 좋은 제품을 생산하는 국내 토종기업이었다. 대한펄프는 국내를 대표하는 토종 생활용품기업으로서 제품의 품질이 우수했고 소비자의 신뢰를 가장 중시하는 기업문화를 갖추고 있어 원포원 프로젝트를 함께 할 기업에 부족함이 없었다. 암웨이로서는 토종기업의 제품판매를 통해 소비자에게 보다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고, 대한펄프는 그들의 판로를 활용해 판매를 촉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1998년 대한펄프가 암웨이에 처음 공급한 제품은 화장지였다. 이를 시작으로 아기기저귀, 화장지, 성인용 기저귀 등으로 점차 품목을 확대했다. 특히 암웨이는 외환위기로 인해 자금 확보가 어려운 점을 감안해 약 20억 원을 선입금했고, 덕분에 대한펄프는 자금 사정이 다소 호전될 수 있었다. 이를 시작으로 두 회사는 상생의 파트너십을 발휘하며 협력관계를 이어갔고, 그 결과 서로 성장하는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암웨이와의 협력관계는 2018년까지 약 20여 년 동안 이어졌다.
대형 할인점의 입점을 확대한 것도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이었다. 특히 이마트와의 협력이 매출 증대에 기여했다. 이마트는 1993년 국내 최초의 대형 할인점인 창동점을 오픈하며 대량 제품 판매와 상시 가격할인으로 유통업계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이를 시작으로 점포 확대 전략에 따라 매년 매장 수를 획기적으로 늘렸는데 대한펄프는 이와 궤를 함께하며 매장에 잇달아 입점했다. 품목도 화장지, 물티슈, 생리대, 기저귀 등 전제품으로 확대했으며, 대형 할인점 전용 제품 개발과 PB제품도 출시하여 판매 촉진과 매출 증대를 도모했다.
암웨이와의 협력 브랜드 ‘One for one’ 제품들창의적 마케팅 전개로 돌파구 마련
대한펄프는 신제품 개발을 통한 고급제품의 창출과 차별화된 마케팅을 경영전략으로 삼고 제품의 고급화 및 기능성을 강화한 신제품 개발과 함께 마케팅에 공을 들였다. 이는 자본 악화로 대형 자본이 투입되는 설비 증설 등을 시도하기 어려운 현실과 국내시장에서 수급 불균형으로 고전하는 제지사업의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한 고육책이자 구성원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당시 대한펄프의 주력 브랜드 ‘깨끗한나라’는 주요 매장에서 단일 브랜드로서 강력한 브랜드 파워를 자랑했지만 화장지부문에서는 유한킴벌리와 모나리자에 밀렸고, 국내 생리대부문에서는 1, 2위를 달리던 유한킴벌리(화이트, 좋은 느낌)와 한국P&G(위스퍼)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이는 생리대처럼 선발주자의 충성도가 높은 제품 특성에 기인하기도 했지만 대형자본을 앞세운 다국적기업을 순수 토종기업이 추격하기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자금 부담이 적고 인적 역량 의존도가 높은 제품 개발과 마케팅에 총력을 기울였다. 특히 생활용품은 소비자의 수요에 맞춰 시장을 어떻게 분할해 마케팅을 하느냐가 성공의 관건이라 판단했다. 이를 위해 매주 정기적으로 전국 다자간 판촉회의를 열어 생생한 현장의견을 수렴하고 매장을 방문하며 소비자의 반응을 직접 챙겼다. 또한 젊은 층 위주로 구성된 혁신팀을 발족, 공정개선을 통한 원가절감과 신상품 개발, 아이디어 제안을 적극 펼치도록 했다. 광고는 개별 브랜드별로 집행하고 소비자의 참여와 소통을 강화한 마케팅 전략을 펼쳤으며, 이에 투입되는 마케팅 비용만큼은 최대한 지원하고자 했다. 제품 출시 후 소비자에게 어떤 인상을 주느냐가 회사의 장기수익을 결정하기 때문에 투자를 아껴서는 안된다고 본 것이다. 물론 대형자본을 앞세운 다국적기업의 물량공세에서는 열세일 수밖에 없었지만 발상의 전환과 기발한 아이디어, 그리고 틈새공략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노사가 합심하여 회사 살리기에 동참
2003년 대한펄프의 재무상황은 크게 악화되었다. 부채비율은 735%에 달했고, 경상 기준 106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이에 2004년을 적자 탈출 원년으로 정하고 신제품 출시를 통한 판매 확대와 더불어 의식개혁과 위기극복을 위한 실천의지를 다졌다. 소비자의 니즈를 반영하기 위해 제품을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하고, 차별화된 신제품을 출시하기 위해 애썼으며 경영혁신 활동의 일환으로 정확한 생산계획 아래 공장의 원가 절감 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이와 함께 회사가 수년간 자금 압박을 겪으며 어려움에 처하자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회사 살리기에 나섰다. 2004년 7월 대한펄프 노조는 창사 이래 처음으로 임금 등 단체협약 내용을 회사 측에 백지 위임했다. 회사로서는 임금 인상 부담에서 벗어나 원가절감을 통한 경쟁력 확보에 힘을 쏟을 수 있는 여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회사 살리기에 노조가 앞장서면서 간부사원들은 여름 휴가를 반납했고, 이는 전 직원의 자발적 동참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노력으로 2004년 흑자경영으로 돌아서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상황이 나아지지는 못했다. 제지사업부문에서는 공급 과잉에 따른 가격경쟁력의 악화와 경쟁 심화, 그리고 중국산 저가제품의 물량공세로 적자가 누적됐다. 생활용품사업부문에서는 신제품 개발과 마케팅으로 선전했지만 투입 비용이 많아 수익을 내지는 못했다. 결국 2005년에는 청주공장 생산직 근로자에 대해서도 구조조정을 단행해야만 했다. 노조가 회사와 함께 전 직원에 대한 업무 평가를 실시해 퇴사 대상자를 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이때 회사를 떠난 근로자 중 대부분이 노조원이었다. 회사는 떠나는 퇴직자에게 위로금을 지급했으며, 남은 직원들 역시 격려금을 걷어 떠나는 동료들에게 행운의 금 열쇠를 만들어 전달했다.
2005년 임금 및 단체협약 조인식(2005. 6. 10)희성그룹 편입과 재무구조 개선
대한펄프는 노사가 뼈를 깎는 아픔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회사 살리기에 나서 2004년과 2005년 연속으로 미미하나마 흑자경영을 실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가격경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매출은 줄고 판매가격은 수익성을 압박하는 지경에 다다랐다. 2000~2003년 4,000억 원대였던 매출액은 2004년부터 2007년까지 3,000억 원대로 내려앉았다. 급기야 2006년 적자경영으로 전환되고, 손실 규모는 2007년 198억 원, 2008년 294억 원으로 점점 커졌다. 설상가상으로 최병민 사장의 건강이 크게 악화되면서 더는 경영을 이어갈 수 없는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렸다.
회사 내부사정과 시장상황 악화 등 이중고에 시달리던 대한펄프에게 희성그룹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2009년 2월 대한펄프는 희성전자에 지분을 매각했고, 이어 유동성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800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실시했다. 이로써 희성전자가 최대 주주로 떠올랐으며, 대한펄프는 희성그룹에 편입됐다. 이후 부채비율이 317%로 떨어지고 재무구조가 개선됐다.
대한펄프는 경영 정상화에 속도를 냈다. 공급과잉으로 인한 가격 하락, 원재료인 고지 가격 급등 등으로 장기 침체에 빠져 2005년 이후 영업이익률이 1%대에도 못 미쳤던 백판지시장이 2008년 들어 수급상황이 개선되고 가격이 인상되면서 회복되기 시작했다. 원 달러 환율이 오르면서 수출도 탄력을 받았다. 대한펄프는 그간의 어려움을 딛고 미국, 일본, 중국, 호주, 러시아 등 전 세계로 산업용지의 수출 물량을 확대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