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3월 대한팔프공업주식회사가 출범했다. 깨끗한나라 55년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1950년대 산업 불모지였던 이 땅에 제지산업의 초석을 놓은 1세대 제지인 최화식 창업주는 산업보국의 경영이념과 진실을 사훈으로, 펄프 국산화와 제지산업의 부흥을 통해 국가 발전에 기여하고자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사업 초기 펄프에서 판지로 생산품목을 변경하고, 의정부공장을 준공하며 생산기반을 구축했다. 현대식 설비를 갖춘 대단위 규모의 의정부공장은 회사는 물론 국내 제지산업의 성장을 견인할 주역이었다. 이와 함께 정직하고 진실하며 화합하는 고유의 문화를 조성해 나갔다.
창립 9년 만인 1975년 기업공개를 통해 국민의 기업으로 거듭났으며, 이를 계기로 해외로 눈을 돌려 ‘화이트 호스’ 자체 브랜드로 홍콩에 직접 수출하는 등 세계시장을 개척해 나갔다. 신양제지를 인수하고 의정부공장을 증설하는 등 사세도 확장했다. 외형 못지않게 내실도 기해 종이컵 원지를 자체 기술로 개발하는 등 기술 혁신 및 제품 개발을 도모하고 품질 및 생산성 향상을 제고하며 토종기업의 위상을 드높였다.
장치산업 특성상 설비에 투자해야 하는 자금부담이 크고 1970년대에 불어닥친 두 차례의 오일쇼크 등 기업 환경은 녹록하지 않았지만 대한팔프는 성장 기반을 착실히 다지며 우리나라 제지산업의 선진화와 부흥을 향한 도전을 이어갔다.
그러던 1980년 11월, 창업주 최화식 사장이 영면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회사 발전과 제지산업에 헌신해온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대한팔프 전 구성원은 슬픔을 딛고 고인의 정신과 그 꿈을 받들어 나갈 것을 다짐하며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6. 신양제지 인수하며 사세 확장1976
신양제지 인수
대한팔프는 1975년부터 직접 수출 전선에 뛰어들었다. 사세 확장과 수출량이 늘어나면서 가뜩이나 공급이 딸리던 물량이 더욱 부족하게 됐다. 이에 판지 1호기와 2호기에 이어 3호기의 추가 설치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던 중 주 거래은행에서 신양제지의 인수 제안을 받게 되었고, 이를 검토한 끝에 1976년 1월 신양제지주식회사를 6억 1,000만 원에 인수했다. 서울 도봉구 창동에 위치한 신양제지는 1967년 9월 최덕삼 사장이 설립한 범진제지공업주식회사가 그 전신이었다. 외자 30만 달러와 내자 1억 7,000만 원을 투입, 1967년 12월 공장을 준공하고 생산을 개시했다. 공장 규모는 대지 1만 2,893㎡, 연면적 2,496㎡으로 공장동과 부속건물로 이루어졌으며, 생산능력은 일산 15~18톤, 연산 7,500톤의 규모였다. 이후 사명을 신양제지주식회사로 변경했으며, 경영을 위임받은 강낙원 씨와 이종구 씨 등이 운영했다. 그러던 중 제1차 오일쇼크 등의 여파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경영위기를 극복하지 못해 결국 1975년 도산, 성업공사에서 관리 중에 있었다. 신양제지 인수전에는 모두 5개 회사가 응찰했으며 경합 끝에 대한팔프가 최종 인수하게 됐다. 이로써 대한팔프는 의정부공장 판지 1호기와 2호기에 신양제지 인수에 따른 판지생산용 초지기 1대를 포함해 모두 3대의 초지기를 갖추게 됐으며, 총 생산능력은 연산 5만 8,500톤에 달했다.
서울공장 의정부공장으로 이설
신양제지 인수 후 대한팔프는 4개월 동안 설비를 정비하고, 공장명을 서울공장으로 개칭했다.
서울공장
이어 6월 30일 서울공장 중대 발대식을 열고 본격적인 업무에 돌입했다. 대한팔프는 서울공장을 의정부공장에 이어 제2 공장으로 운영할 계획이었으나 운영 및 관리비용이 예상보다 과다한 데다 인력 배치 및 교육 등 공장 이원화에 따른 비효율성이 지적됐다. 게다가 1979년 발생한 제2차 오일쇼크로 기업환경이 크게 악화되자 원가절감과 효율성 제고를 위해 1981년 4월 서울공장의 설비를 의정부공장으로 이설하고 제3호기라 개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