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나라의 리더,

진실의 리더십

  • 우뚝 선 나무, 진실의 든든함을 나누다_최화식 창업주

    최화식 창업주의 리더십은 구성원과 공존하며 완성됐다. 구성원 모두가 저마다 의사결정 책임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당당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었다. 개개인이 조직문화의 주체자로서 역할을 다하는 가운데 스스로 의사를 결정하고, 서로의 의사결정에 도움을 주도록 격려했다. 깨끗한나라 기업사의 주춧돌을 세운 최화식 창업주의 리더십은 오늘날 깨끗한나라의 지표로 많은 이들에게 잊히지 않는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 깨끗한나라의 주춧돌을 놓다

    최화식 창업주는 그가 살아온 삶 속에서 리더십의 지향점을 찾았다. 제지업계를 통해 평생 사업보국과 기업의 진실을 염원해 온 그의 성공적인 삶과 꿈은 창업 초기 깨끗한나라의 기업문화를 형성하는 데 필수적인 수단인 동시에 충분히 예상된 결과였다.

    그의 리더십은 깨끗한나라 구성원과 공존하며 완성됐다. 구성원 모두가 저마다 의사결정 책임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당당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었다. 개개인이 조직문화의 주체자로서 역할을 다하는 가운데 스스로 의사를 결정하고, 서로의 의사결정에 도움을 주도록 격려했다. 자신의 주도적인 판단과 실행에 대해 책임질 줄 알고, 타인의 의사결정에 대해서도 서로가 서로를 리드할 수 있는 발전적인 관계를 형성하도록 한 것이다.

    최화식 창업주는 제지업계에서 뿐만 아니라 사내에서도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스스로는 남들로부터 존경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무엇인가를 행한 적이 없었다. 다만 늘 진실한 태도로 매사에 임했을 뿐이었다. 제지업계에서는 오랜 경륜과 덕망으로, 사내에서는 속 깊은 보살핌과 존중으로 사람을 대했다. 대한팔프 직원들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자신들을 존중해 주는 창업주에게 존경심을 보냈다. 존중하고 존경받는 관계가 성립됐다. 오랫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체화된 관계였다.

    최화식 창업주의 리더십은 깨끗한나라 기업사의 주춧돌을 세웠다. 그런 동시에 자신의 삶과 꿈을 완성함으로써, 깨끗한나라의 나이가 더할수록 오늘날의 지표로 더욱 많은 이들에게 잊히지 않는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최화식 창업주

  • 얻은 것이 있다면 나누어야 한다

    최화식 창업주는 1966년 대한팔프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기 이전부터 이미 우리나라 제지업계의 인재로 손꼽혔다. 그는 어린 시절 화신백화점 문방구부 소년으로 종이와 인연을 맺은 이래, 현장에서 배우고 익힌 전문지식을 살려 1947년 서울 종로에서 덕문상사(德文商社)를 설립했다. 6・25 전란을 겪으면서는 피난지 부산에서 사업의 내실을 다진 뒤, 1954년 무역회사 국화산업(國華産業)을 세우고 해외에서 지류와 문방구류 등을 수입해 판매했다.

    이러한 경험을 기반으로 오랜 숙원이었던 제지산업계 진출을 모색한 최화식 창업주는 1958년 2월, 당시 서울에서 지류 도매상으로 명성이 높던 단사천(段泗川) 사장, 양치목(楊致穆) 사장과 힘을 모아 한국특수제지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국가 문화사업에 더 크게 기여하자는 뜻을 함께하고 제지업계에 정식으로 등장한 것이다.

    최화식 창업주는 국내 제지의 판로를 일찍부터 잘 파악하고 있었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길러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힘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만 3년 5개월 동안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한국특수제지의 기반을 완벽하게 다져 놓는 동안 자신이 배운 것을 직원들과 나누기 위해 한시도 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무엇인가 남보다 더 배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받은 혜택이니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지식이든 기술이든 우선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찾아 함께 나누고, 사업이 확대되면 국가경제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신념은 1966년 대한팔프공업주식회사를 창업한 이후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얻은 것이 있다면 반드시 나누어야 한다는 믿음에 변함이 없었다.

  • 사람과 함께하는 길, 나라에 보답하는 길

    최화식 창업주는 젊은 시절부터 명석한 두뇌, 정확한 판단력 등 기업가적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했던 자질은 평생을 통해 항상 “내 자신은 물론 사회와 국가에 공헌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질문한 데 있었다.

    전문경영인으로 한국특수제지 공장 건설과 경영에 전념한 최화식 창업주는 창업 초기의 경영상 어려움을 극복하고 신설 공장이 본격 가동한 지 1년 만에 흑자를 기록했다. 경이적인 성과의 바탕을 이룬 배경 가운데 하나는 직원들과 동고동락한 최화식 창업주의 특별한 동지애적 인간관이었다. 자신이 이끄는 공동체 구성원을 대하는 최화식 창업주의 관점은 그가 생활신조로 삼아 몸소 실천한 공생・공존에서 시작되어 기업 경영을 통한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신념으로 이어졌다.

    최화식 창업주에게 공생과 공존의 삶은 대한팔프의 모든 구성원이 서로 도와서 함께 존재하고, 서로에게 이익을 주어 함께 사는 삶이었다. 그는 자신과 가까이에 있는 이들을 살피는 것으로부터 출발해 궁극적으로 사업보국에 이르고자 했다. 먼저 배움으로 얻은 이득을 함께 나눔으로써 종업원들과 공생하고, 나아가 제지업계의 발전과 제지인의 권익 보호에 힘쓰고, 기업 경영을 통해 국가경제에 기여하겠다는 신념을 잃지 않았다.

    후진국인 1960년대의 우리나라가 산업화를 통해 부강할 수 있기를 염원하던 최화식 창업주가 종이와 처음 인연을 맺었을 때만 해도, 제지업은 그에게 산업화를 이룰 하나의 수단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한 나라의 문화를 전승하는 수단이며, 문화 발달의 척도가 종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사업보국은 사업을 통해서 나라를 이롭게 한다는 말이고, 이는 곧 기업 경영을 통해 사회 전반적인 부와 이익을 창출한다는 뜻이다. 최화식 창업주는 기업 조직의 공통된 목적을 향한 대한팔프 전체로서의 일체감을 이끌어내고, 이를 궁극적으로 경영 성과에 연결함으로써 깨끗한나라 55년의 초석을 굳건하게 다져놓았다.

  • 존중하고, 존경받는 관계를 이루다

    최화식 창업주는 명절을 앞둔 날이면 항상 잊지 않고 가는 곳이 있었다. 명절 음식을 준비해둔 이정숙 여사와 동반해 의정부공장의 생산현장을 찾는 일이었다. 평소에도 현장 기술자들을 각별히 우대해오던 그였기에 생산현장 방문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명절 분위기 속에 현장을 찾아온 창업주를 대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여느 때보다 더한 반가움이 가득했다. 마련된 음식은 특별하지 않았지만 대한팔프에 대한 소속감이 고양되고 남다른 정겨움으로 가득했던 것은 최화식 창업주의 남다른 태도 때문이었다. 함께 참석한 이정숙 여사에게 현장 직원들을 일일이 소개하며, 그 때마다 어깨동무를 하며 ‘우리 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람’, ‘우리회사 최고 기술자’라는 소개를 덧붙이고는 했다. 마치 속삭이듯이 차근차근한 목소리였지만 생산현장의 기술자들에게는 그보다 더 큰 칭찬과 격려가 없었다. 개별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챙기며, 명절 금일봉까지 전달해 분위기는 말할 수 없이 훈훈했다.

    대한팔프 직원들이 나이와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서로 믿고 존중하는 관계, 가족과 같은 신뢰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모임은 그 밖에도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2~3년에 한 번씩 의정부 공설운동장을 빌려 개최한 체육대회였다. 직원 화합을 위한 행사에서도 그랬지만, 특히 전 직원 체육대회가 열리면 가족들을 모두 초청해 즐거운 시간을 함께 했다.

    대한팔프는 기숙사 또한 잘 갖추어 당시로서는 나무랄 데 없는 시설을 자랑했다. 12개가량의 내실을 마련한 기숙사는 지방에서 상경한 직원이 주로 사용했다. 처음에는 공장 내에 울타리 내를 두었으나, 이를 변경해 공장 밖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공장 구내에 테니스장 시설을 갖추고, 통근버스를 운영한 것도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최화식 창업주가 자신이 누구보다 회사의 각종 행사나 회식을 중시했기 때문에, 대한팔프의 행사나 회식은 하나의 공통목표를 향한 구성원 상호간의 이해를 높이고, 서로를 이해하는 자리가 됐다. 최화식 창업주는 대한팔프의 최고경영자이기 전에 한배를 탄 가족을 이끄는 집안의 어른으로 구성원들을 이끌었다.

  • 미리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다

    1960년대 들어 진행된 1·2차 경제개발에 힘입어 국내 경제가 크게 성장하고, 많은 투자가 이뤄지는 동안 거대한 제지공장을 짓는데 들어간 자본은 대부분 외국에서 들여온 대규모 차관이었고, 제지시장의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정부는 1969년 11월 재정긴축과 유동성 규제를 골자로 하는 ‘안정 기조 구축을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이 조치로 인해 1969년 15.9%였던 경제성장률은 1970년 8.9%로 절반 가까이나 내려앉았다. 국제 펄프 파동으로 원가가 상승해 원료 조달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1970년 6월 반표백크라프트 펄프(SKP) 가격은 전년대비 30% 이상 상승한 톤당 205달러에 달했다. 또 정부가 산업비림(産業備林)01) 제도의 운용방식을 변경하는 바람에 원목 조달도 힘들어졌다. 자연히 원목 값도 불안했다.

    대한팔프는 설립 이듬해인 1967년 12월부터 의정부공장 가동에 들어갔다. 상공부 수출품생산 지정업체(상공부 인가번호 제5-97)로, 일관작업 시스템에 따라 마닐라 판지, 라이너 원지, 골판지 상자 등을 만들었다. 하루에 생산한 물량은 기존 업체들이 보유한 초지기의 경우 20톤이 고작이었으나 대한팔프는 무려 50톤에 이르렀다. 1만 2,000톤이던 연간 생산량 또한 두 차례 설비 증설을 거쳐 1970년에는 1만 8,000톤으로 늘어났다. 대한팔프는 이처럼 규모의 경제에 걸맞은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었기 때문에 판지업계의 낙후성을 벗어날 수 있었다. 제지 경쟁사들의 열악한 시설과 생산량, 향후 종이 수요급증에 따른 공급 부족 현상 등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예상함으로써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기로 결정한 덕분이었다. 앞날을 미리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는 안목으로 앞서갔던 만큼 넘어야 할 산도 높았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대량생산으로 원가를 절감하고 종이류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서는 대규모 생산시설이 필요하게 되리라는 최화식 창업주의 판단이 옳았던 것이다.

    01) 산업비림(産業備林, Industrial Forests) : 펄프 제조업, 탄광업 또는 연간 5,000㎥ 이상의 국내산 원목을 원자재로 이용하거나 가공하는 기업이 필요한 원자재를 자급할 목적으로 소유, 사용하거나 수익을 낼 수 있는 산

  • 제지업계 초유의 흑자 기록과 매출 100억 원 돌파

    1972년 박정희 정권은 긴급명령권을 사용해 이른바 ‘8.3 조치’를 전격 발표한다. ‘경제의 안전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이 조치는 일반적인 시장경제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전국의 사채를 단숨에 동결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세금을 내지 않던 사채시장은 크게 위축된 데 반해, 지하금융의 자본이 제도권 금융으로 흡수되면서 장기적으로 자본시장이 정상화하는 계기가 마련됐다. 8.3조치의 영향으로 비약적인 경제발전이 뒤따르고, 언론 출판 교육이 활기를 띠면서 종이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국내 경기가 호황을 맞이하자 대한팔프도 1972년 10월부터 12월까지 3개월 동안 제지업계 초유의 흑자를 기록할 수 있었다. 최화식 창업주는 이러한 시대적인 흐름을 타는 중에도 제지 수요 증가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시설 증설을 면밀하게 검토했다. 이러한 사전 조사 결과에 따라 최화식 창업주는 1971년부터 이미 계획했던 코팅판지(SC마닐라 판지) 시설인 제2호기 증설을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적정기업 단위 규모의 대형화 추세에 맞추어 1973년 10월 17일02) 의정부공장 제2호기를 준공하고, 초지기(抄紙機)와 에어 나이프 코터03)를 추가 설치한 뒤 11월 7일에 준공식을 가졌다.

    의정부공장 2호기 준공식에서 인사말을 건네는 최화식 창업주(1973. 11. 7)

    02) 매일경제, 1973.11.13

    03) Air Knife Coater : 코팅컬러를 종이 표면에 바른 후 얇은 틈으로 분사되는 공기로 코팅량을 조절한다.

  • 열린 공장, 개방의 디딤돌이 되다

    당시 국내 제지업계에서 공장 신설이나 시설 증설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설공사를 마치고 마련되는 기념식 자리는 어느 회사든 한결같이 판에 박은 듯 개성이 없었다. 사내 행사로 조용히 자축하는 정도가 고작이어서 별다른 전망이나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생산현장에서 회사의 제품을 책임지고, 자신의 본업에 충실한 이들이야말로 누구보다 주인공이어야 했지만 별다른 자긍심을 갖기 어려웠다. 자신의 일터였음에도 막상 공장의 면면을 두루 알지 못했고, 시설 변화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실감하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었다.

    거의 모든 업체에서 이와 같은 소극적인 행사가 매번 되풀이됐지만, 누구도 그 문제점을 드러내놓고 지적하거나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최화식 창업주는 분명히 달랐다. 그는 자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았고, 대한팔프 의정부공장 2호기 준공식을 계기로 바로 자신의 바람을 담은 행사를 열고자 했다. 평소 현장에서 직원들과 함께 회사의 성장과 발전을 이끌어가기를 바란 기업인으로서 상공부와 산업은행의 귀빈과 마찬가지로 전 직원이 함께하는 화려한 준공식을 준비한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최화식 창업주는 그 동안 대한팔프 직원은 물론, 제지업계 관계자도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방식의 준공식을 준비했다. 업계의 오랜 관례를 깨고 행사 자체를 외부에 공개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이전까지 제지업계에서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행사가 열렸다. 누구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사내 체육행사에 참석한 최화식 창업주

    대한팔프 구성원들의 사기를 드높이려는 취지에서 준공식을 준비하고, 제지업계 사상 처음으로 자사 제품의 생산 과정을 외부에 공개해 이를 홍보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업계에서도 커다란 화제를 불러왔다. 이는 곧 별다른 자각 없이 자사 공장과 외부를 단절해오던 국내 제지업계의 공장에 자극을 주었고, 그 무렵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던 산업합리화 운동과 맞물려 이전과 다른 개방체제를 불러왔다. 저마다 자발적으로 폐쇄성을 벗어나는 공장들이 하나 둘씩 줄을 잇기 시작했다.

    최화식 창업주는 이처럼 의례적으로 진행되던 행사 하나에도 의의를 부여함으로써 대내외적인 전환점을 모색하고, 이를 통해 상황을 리드해나갔다. 그 시작은 사내의 여러 행사 가운데 하나인 시설준공식을 개방한 것이었지만 파급력이 컸다. 기업운영과 관련한 모든 정보를 공개하고 의사결정과정을 투명하게 이끄는 ‘투명경영’의 단초를 제공했으며, 나아가 기업경영을 바라보는 시각에 공공성이나 윤리성이라는 개념의 싹을 틔운 것이었다.

    제지 2호기 준공식에서 외부 손님을 맞이하는 최화식 창업주(1973. 11. 7)

  • ‘세심’과 ‘대담’의 리더십

    열린 공장을 시도한 것은 대외용으로 마련된 일과성 행사로 그치지 않았다. 최화식 창업주는 제2호기 준공과 함께 판지류(SC마닐라 판지・마닐라 원지・크라프트 판지・아이보리)와 골판지 원지류 생산에 집중하며 1970년대의 새로운 시장 환경을 주도해 나갔다.

    1973년 대한팔프의 당기순이익은 3억 6,300만 원을 기록했다. 놀라운 점은 불과 3년 전이었던 1970년 실적 3,600만 원보다 무려 10배의 성장을 구가한 사실이었다. 한 해 전인 1972년 실적인 1억 원과 견주더라도 3배가 늘어난 흑자였다. 이후로도 지속적인 성장 가도를 달려 1976년에는 회사 창립 이래 처음으로 매출액 100억 원을 돌파하면서 6억 4,700만 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하는 등 1970년대 흑자 기록의 정점에 올랐다.

    대한팔프가 제지업계 사상 초유의 실적을 거두었음에도 최화식 창업주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의 타고난 성품은 침착함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사회에 뛰어들었고, 일본으로 유학길을 떠나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대학을 마친 사람이 그였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남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또한 평소 그의 생활신조 가운데 하나인 ‘세심(細心)’과 ‘대담(大膽)’은 당시 경제지 지면04)에도 소개됐다. “만사를 세심하고 정밀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일을 하되 소극적이 되지 않도록 대담하게 일을 처리한다.”는 리더십은 창업 초기부터 어김없이 적용됐다. 창립 이래 최대 성과를 거둔 상황에서조차 섣부른 판단을 내리지 않는 그의 차분한 태도가 새삼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것이다.

    04) <사람・기업,-제지시설 3만여 톤으로 확장한 최화식>, 서울경제신문, 1973.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