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섬유사업으로 태어나 첨단소재로 거듭나다(1972~1998)
제1절. 제일합섬의 탄생과 성장
1. 화섬업계의 새 장을 연 제일합섬의 탄생
삼성그룹의 제일모직공업주식회사도 1960년대 중반부터 합섬 생산과 기술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제일모직은 일본 도레이의 지도로 기술력을 쌓아가고 있었는데 한국전쟁 이후 베이비붐 세대의 성장에 따라 수요가 증대되면서 생산시설 확충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다.
제일모직은 1968년 8월 경산공장에서 준공식을 갖고 본격적인 가동에 돌입했다. 최초 66만 1,157m²의 부지에 1차로 건설된 경산공장은 향후 국제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폴리에스터/레이온(T/R) 방적 1만 추의 대단위 규모와 고속 방식의 소면기·직기 등 최신설비를 갖추고 혼방소재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일 모직은 이 경산공장을 하나의 사업부로 계속 운영하기에 부담이 컸고 화학섬유 전반으로 범주를 넓혀가지 않는다면 미래가 불투명했기에 또 다른 방안을 모색했다.
제일모직은 당시 글로벌 판매조직과 수출시장을 확보하고 있던 일본 도레이(주)와 미쓰이물산(주)과의 합작투자를 추진했다. 제일모직은 경산공장을 독립시킨 새로운 회사설립을 가시화하면서 내국인 투자 20억 원과 함께 도레이와 미쓰이물산의 각 100만 달러 등을 합친 총 28억 원의 자본금으로 제일합섬주식회사를 탄생시켰다.
1972년 7월 창립한 제일합섬은 국내 섬유산업 발전의 새장을 열 것을 천명하며 화섬산업계에 그 이름을 올렸다. 제일합섬은 설립 당시 총 자산규모 135억 원에 설비규모는 화섬방 3만 1,104추, 제직시설 348대, 염색가공 및 부대시설 각 1대, 폴리에스터 가공사 시설 2,752추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생산설비를 바탕으로 T/R소재의 혼방제품을 주력으로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를 가동했다.
1970년대 당시 경산공장 항공 사진
1973년 10월 제1차 석유파동이 발발했다. 제4차 중동전쟁으로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에 소속된 국가들이 자원을 무기화한 것이다. 당시 원유 공시가격이 순식간에 70% 인상됐고 그나마도 단계적인 감산으로 인해 유가가 고공비행을 했다. 화학섬유 생산업체들은 원료수급에 큰어려움을 겪었고, 국제분쟁이 야기한 예상치 못한 난관을 돌파해 나가야만 했다. 제일합섬은 사상 초유의 석유파동을 계기로 보유하고 있던 대량 고속설비와 T/R제품의 특성을 동시에 살릴 수 있는 ‘소품종 대량생산 체제’로 과감한 변신을 실행했다. 또한 모든 설비와 공정, 품질에 대한 관리체계 전반을 재정비하여 외부의 충격을 성장으로 향하는 디딤돌로 삼았다.
제일합섬은 합섬 중 가장 수요증가가 크고 경산공장에서도 원료로 사용하고 있는 폴리에스터 원면(PSF) 사업 추진을 결정하고 구미시의 부지 128만 9,256m²를 매입하여 1974년 6월 말에 구미공장을 완공했다. 이 공장은 국내 최초로 폴리에스터 원면 생산공정에 일본 도레이로부터 도입한 TPA공법을 적용하여 일산 50톤의 규모를 갖추었다. 이 신공법은 제일합섬이 후발기업이면서도 앞선 다른 기업들보다 대량생산과 원가절감에 성공하게 함으로써 더 높은 생산성을 갖출 수 있게 했다.
1973.03 구미공장 기공식
1977.07 제일합섬 창립 5주년 기념식
경쟁사의 독점을 누르고 사장 판도를 바꾸다
거대한 미국의 자동차 산업 구조마저 바꾸게 했던 석유파동의 여파는 1975년 하반기가 되자 점차 회복국면에 접어들면서 세계 경제가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국내 수출경기도 새로운 탄력을 받아 상승하게 되자 제일합섬은 경기 회복 기류를 타고 회사 규모를 키워 화섬산업 내에서의 입지를 확장하기 위해 기업공개 절차를 실행했다.
1977년 3월 주주총회 의결로 기업공개를 결정하고, 신주 공모로 30억 원을 증자해 자본금을 100억 원으로 증액했다. 1977년 경산공장의 가공사 공장을 증축한 데 이어 1979년 3월에는 구미공장 PSF 연중직방 라인 도입을 위한 증설공사에 착공했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경산공장 연속염색 공장을 완공했다. 12월에는 기술연구소 건설에 착공하는 등 숨 가쁘게 진행한 일련의 투자를 통해 국내 최고의 품질과 기술력을 완비한 종합섬유업체로의 도약을 위해 각 부문의 경쟁력을 키우는데 노력했다. 1982년 7월에는 폴리에스터 원사 공장을 준공함으로써 드디어 섬유원료에서 염가공에 이르는 일관생산체제를 완비한 종합섬유메이커로 올라서게 됐다.
제일합섬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1983년 6월 1차 설비증설과 함께 차별화 제품을 내놓으며 공격적 경영에 박차를 가했다. 트레이닝복 상표인 <다이내믹>으로 DTY(Draw Textured Yarn) 판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신제품 DTY 75d TB를 출시해 당시 경쟁사의 독점을 누르고 시장 판도를 바꿔 나갔다.
1973.10 구미공장 건설 전경
비섬유로 다각화, 국제화를 위한 적극 행보
1979년 2차 석유파동으로 또 한번 주춤했던 세계 경제가 다시 호황국면에 접어들면서 섬유의 수요도 폭증했다. 중국을 비롯한 후발국들이 섬유산업에 뛰어들어 한국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제일합섬은 이들의 도전에 직면하면서 저성장 기조로 접어든 섬유사업에서 탈피하여 고부가가치 성장산업군으로 방향타를 돌려 비섬유 분야로 사업 다각화를 시도했다.
비섬유 분야의 선두주자는 폴리에스터 베이스 필름사업이었다. 필름은 산업용에서부터 전기·전자, 의료, 위생자재, 식품포장, 디스플레이 등 향후 수많은 제품에서 사용 될 가장 범용성이 높은 소재였다. 또한 필름은 폴리에스터 섬유생산에서 축적한 기술을 바탕으로 동일한 원료를 사용하고 기존의 중합기술을 이용할 수 있어 접근이 용이한 관련 사업의 하나였다.
제일합섬의 베이스 필름사업은 한국과학기술원과 의료용 필름 및 인쇄 제판용 필름의 제조개발에 들어간 것으로 시작됐다. 제일합섬은 1983년 9월 국내 최초, 세계 6번째로 비디오테이프용 폴리에스터 베이스 필름 개발에 성공했다. 양질의 비디오테이프용 베이스 필름 제조에 자신감을 얻은 제일합섬은 1984년 3월 필름 제1라인 건설에 들어갔다. 266억 원이 투입된 필름 1라인에서는 1985년 시제품 생산에 성공한 후 연산 6,000톤 규모의 본격 생산에 들어갔다. 1985년 9월 해외수출을 시작, 가동 첫 해인 1985년 127억 원의 매출을 달성해 내는 개가를 올렸다.
베이스 필름의 경우 전 세계적으로 VTR의 생산증대에 따른 비디오테이프의 수요증가로 여러 나라가 경쟁적으로 자기용 필름라인 증설에 돌입했다. 제일합섬은 1985년부터 증설에 착수해 연산 7,000톤 규모의 제1차 증설 설비를 착공했다. 1986년 10월에 증설을 완료한 제일합섬은 기존생산량과 합쳐 연간 1만 3,000톤 규모의 세계 10대 베이스 필름 메이커로 발돋움했다. 이후 1988년 3월 제2차 증설라인을 완공했으며, 1989년 9월에는 제3차 증설, 1990년 12월에는 제4차 증설로 연간 생산규모가 3만 7,000톤에 이르는 대량생산의 기틀을 마련했다. 제일합섬의 고급화, 다양화 추진은 필름사업의 경쟁력 향상은 물론 이 사업을 통해 저성장 기조의 섬유산업으로부터 탈피해 성장을 가속화할 수 있는 활로를 열어주었다.
베이스 필름 개발과 사업에 성공한 제일합섬은 또 다른 행보를 시작했다. 직물 부문의 사업구조 강화와 고부가가치화를 위해 구상한 사업의 하나가 부직포 사업이었다. 부직포는 직조하지 않은 섬유로 접착제나 섬유 자체의 융착력과 엉킴을 이용하여 직물과 같은 형태로 제조하는 것이다. 산업의 발달과 소득수준의 향상으로 국내에서도 부직포 소재가 널리 쓰일 것으로 전망한 제일합섬이 이 사업을 처음 검토한 것은 1983년이었으나 사업화 규모에 비해 아직 시장규모가 크지 않다는 결론을 내려 일단 사업을 보류했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국민 소득수준 향상과 함께 농업용이나 생활용 주요 소재로 스펀본드 부직포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수요가 늘어나 1988년 하반기에 다시 부직포사업을 검토 대상에 올렸다.
1982.07 필라멘트 공장 준공식
1985.07 폴리에스터 베이스필름 공장 준공식
제일합섬이 스펀본드 부직포사업에 참여한 것은 1989년 초였다. 사용 원료에 따라 구분되는 PP(Polypropylene)스펀본드 부직포와 PET(Polyester)스펀본드 부직포 두 가지 모두가 전망은 밝았으나, 기술 확보가 용이한 PP 스펀본드 부직포를 1차 사업화하기로 결정했다. 경산공장의 방적 공장 옆 부지 위에 터를 잡은 스펀본드 부직포 공장은 1990년 4월 설비조립을 시작해 7월부터 정상 가동에 들어갔다. 초기에는 제품의 품질이나 선발업체와의 경쟁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지만 일부 수출시장을 공략하는 한편 국내 마케팅을 농업용 비닐하우스 용도에 주력하면서 서서히 판매실적을 올렸다.
제일합섬은 제조업 국제화의 궁극적인 목표 달성을 위해 1987년 7월 인도의 바로다 레이온사로부터 폴리에스터 필라멘트 플랜트를 수주함으로써 해외 생산 활동의 서막을 열었다. 국내 최초로 3,500만 달러에 달하는 화섬플랜트를 수출한 이 계약은 우리나라도 대형 플랜트를 수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확인한 사례로서 관련 업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이 수출에 고무된 제일합섬은 1988년 7월부터 인도네시아의 야손타(Yasonta) 그룹에 연속 3건의 방적 및 제직플랜트를 수출하는 성과를 올렸다. 당시만 해도 단위 기계나 플랜트 과정 일부분의 기술 수출에 머물고 있던 한국의 플랜트 수출산업에 뜻깊은 기록이었다. 뿐만 아니라 플랜트 수주과정에서 상호 간에 구축한 신뢰를 바탕으로 1990년 제일합섬과 삼성물산, 야손타그룹이 야삼 텍스타일즈(P.T Yasam Textiles, 현재 TATI)를 설립해 해외 첫 합작회사의 결실을 맺었다.
수출시장과 농업용시장에서 급신장한 부직포. 사진은 첫 수출제품 출하식
1987.07 인도 바로다 레이온사 플랜트 수출 계약식
1988 인도네시아 야손타그룹과 총 4,000만 달러 규모의 방적 플랜트 수출 계약식
이처럼 정밀화학 분야에서 사업다각화의 기반을 지속적으로 구축한 제일합섬은 세계 플라스틱 업계의 흐름이 과거의 기본수지 중심에서 특수가공에 의한 신소재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간파했다. 1987년을 전후해 폴리아세탈과 ABS(Acrylonitrile Butadiene Styrene) 사업 등을 검토한 결과 일부는 보류하거나 삼성그룹 관계사로 이관하기로 결정했지만, 전기·전자·자동차 등 주요 기간 사업분야와 정밀기계 및 화학 분야에서 두루 필요로 하는 에폭시수지 사업은 제일합섬이 직접 수행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1988년 7월 스위스 시바가이기(Ciba-Geigy)와 특수 에폭시 수지를 생산하는 제일시바가 이기 설립에 합의, 그해 11월 정식으로 첫 자회사를 출범시켰다.
P O W E R I N T E R V I E W
필름제조에 세월 가는 줄 몰랐다!
이영관 회장
제일합섬 시절이던 1984년 필름공장을 짓게 되었는데 그 어디서도 기술을 주지 않아서 온갖 정보를 다 모아 천신만고 끝에 완공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가 비디오, 오디오테이프용으로 연간 4,500만 달러씩 일본에서 필름을 수입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이 필름을 개발해서 수입대체 효과를 거두자는 강한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공장을 짓는 것뿐 아니라, 품질과 공정을 안정시켜야 하는 모든 책임도 내가 져야 하는 것이어서 어려움도 많고 책임감마저 무거웠습니다. 그런데 잘 정리된 정보가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얻어 조합한 정보로 공장을 짓다 보니 제품의 품질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정말 밤새며 힘들게 제품을 만들어내도 경영회의에서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되느냐, 손실이 얼마나 많이 발생한지 아느냐” 하는 질책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어느 날 수십 명의 간부들이 참석한 전사 전략회의에서도 여지없이 질책을 듣게 되었는데, 제가 브리핑을 끝내면서 내년 회의 때까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옷을 벗겠다고 선언을 하고 그 길로 바로 공장에 들어가서 전 직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이왕 고생하는거 제대로 해서 4,500만 달러 규모의 수입 분을 확실히 대체하자고 결의를 다지고 그날부터 공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나니까 수입하던 물량을 우리가 다 대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친 김에 1등도 해보자는 생각에 다시 또 직원들과 의기투합하고 정신없이 일을 해서 결국 우리가 수입해오던 일본 회사에 역으로 필름을 수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전 직원이 몰두해서 어느 정도 성과를 냈다 싶으니, 88서울올림픽이 끝나 있더라고요.(웃음) 제가 지금도 직원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이 현장을 중심으로 주인정신을 굳게 다지고 임하면 아무리 어려운 과제도 분명히 성공해 낼 수 있다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