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도레이와의 만남으로 비상의 날개를 달다
제1절. 좋은 만남, 좋은 소재, 좋은 세상 만들기

2. 좋은 소재, 삶의 질을 높이다

2000년도 상반기에 접어들며 경제성장률 상향 예측과 지속적인 외국인 투자자금의 유입, 국제유가의 하향 안정세 등 여러 정황들이 청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화섬 업계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가격경쟁력을 앞세운 중국이 맹렬하게 추격해왔고, 비섬유 사업 부문에서 올리고 있던 성과는 공급초과로 기업간의 과당경쟁을 유발하고 있어서 공멸의 위기를 벗어날 돌파구가 필요했다.
도레이새한은 미래 성장성이 높으면서 고부가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분야로 사업구조조정을 하기 위해 설비투자와 연구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주력 제품인 폴리에스터 필름의 수익성을 높이는 한편 미래를 위해 전자·정보통신 부품, TFT LCD 등 고부가가치 IT관련 소재개발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폴리에스터 칩, 특품화로 흑자실현

원료로서 폴리에스터 칩은 원면과 원사, 폴리에스터 베이스 필름과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폴리에스터 병용 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용도로 공급되어 왔다. 전담인력 없이 시작한 칩 판매는 2000년에 전사 매출액 2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정작 영업이익은 마이너스였다. 적자 해소 방안을 모색한 결과 칩 판매 전담부서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2001년 3월 칩 판매 TF팀을 전격 발족했다. 판매가 인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고가판매 위주의 거래선 발굴에 중점을 두고 판촉활동을 편 TF팀은 발족 첫해인 2001년부터 적자를 줄여갔고 2002년 2월에는 정식으로 칩 판매팀을 출범시켰다.
칩 판매팀이 다각적인 활동을 벌인 결과, 2002년에는 도레이새한 출범 후 처음으로 영업이익 29억 원을 달성하며 전세를 역전시켰다. 칩 판매의 흑자전환은 ‘수지도 수익을 낼 수 있는 사업’이라는 발상의 전환을 불러왔고, 수지사업부의 신설을 이끌어냈다.
2003년 7월 출발한 수지사업부는 기존의 칩 판매팀과 함께 특수사업팀을 개설해 2팀 체제로 운영됐다. 수지사업부는 각각의 고객별로 적합한 가격체계를 설정해 탄력적으로 대응하며 영업활성화 정책을 펴나갔다. 고정 거래선의 경우에는 원료가를 기반으로 가격을 정함으로써 안정화를 기했으며, 스폿 거래선은 당시의 시가를 적용해 판매하는 합리적인 거래관계를 구축했다.
당시 도레이새한과 도레이에서 칩을 구매하던 한 일본 업체는 도레이보다 kg당 10엔 낮은 구매 가격을 요구했다. 이에 도레이새한은 품질수준으로 따라잡겠다는 각오로 끊임없이 품질 개선을 추진한 결과 드디어 도레이와 동일한 가격을 받는 데 성공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특품 칩 개발 의욕도 거세졌다. 필름용, 섬유용, 부직포용 등 용도별 칩 대량생산에 한정되었던 도레이새한은 배치 칩을 활용한 제품 다양화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노력의 성과는 연속적인 특품 칩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2002년 8월 스펀본드 부직포 제조공정에서 엠보싱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저융점 Co-PET 칩을 개발하였고, 2003년 3월에는 Toray Fibers(Nantong)Co., Ltd.의 섬유특품 칩 개발, 2004년 6월에는 수축필름용 칩을 개발하는 등 특품 칩 개발의 새로운 역사를 이어갔다 .
특품 칩의 개발로 회사 내적으로는 배치라인의 가동률이 향상되면서 2004년도에는 전년 대비 29%의 성장을 달성해 낼 수 있었다.

차별화·고부가가치화, 원사의 변신

국내 원사 부문의 성장세는 1990년대 초반까지 중국 시장의 필라멘트 직물 수요에 힘입어 지속적으로 이어져왔으나,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중국이 생산기지로 성장하고 동남아시아의 개발도상국들까지 폴리에스터 원사 증설을 계속해 세계적으로 생산량이 큰 폭으로 늘어나 1998년을 전후로 극심한 공급과잉 징후를 보였다.
새한은 1997년 1월 일산 150톤 규모의 연중직방설비를 증설하였지만, 도레이가 합작 당시 직방설비만을 매수함에 따라 도레이새한의 생산 제품은 정번품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도레이새한은 직방 설비에서 최대 효율을 올릴 수 있는 소품종 대량생산에 주력하면서 원사사업의 미래 성장을 위한 전략으로 ‘차별화’에 주력했다. 원사사업부는 2000년 4월부터 견(絹)과 유사한 촉감과 광택을 보이는 이형단면사 연구개발에 들어갔다. 또한 이를 더욱 다양화시켜 중공사와 편평사, 십자단면사 등의 여러 품종을 개발하여 고급화했다.
2001년 8월에는 엘레스팍(Elespark), 에어로탑(Aerotop), 매직쿨(Magicool) 등 5개 브랜드의 특허등록과 상표출원이 이뤄졌다. 이듬해인 2002년에는 엘레스팍웨이브(Elespark-Wave)를 개발해 고밀도 스포츠 캐주얼복에 적용함으로써 엘레스팍 브랜드는 시장을 주도하는 제품군으로 안착했다.
2001년 10월 고부가가치 제품개발의 야심작으로 TQS(Toray Saehan Quenching System)제품 연구를 진행해서 2003년 7월부터 TQS 제품을 초극세사 시장에 진출시켰다.
초극세사 신제품의 개발과 그에 따른 시장 확보를 통해 원사사업의 차별화율은 1999년 출범 당시를 0%로 놓고볼 때 2004년에는 16%, 2009년에는 36%에 품종도 15종이 75종으로 늘어나는 성과를 달성했다.

대동(大東) 클러스터, 섬유산업 스트림간 협력

2000년대로 들어서며 중국 섬유산업이 고속성장을 하면서 국내 화섬업계는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다운스트림 생산업체들의 침체가 심각하게 진행되었다. 도레이새한도 2004년부터 영업이익이 마이너스로 돌아서는 등 섬유경기 전반에 닥친 높은 불황의 파고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2004년 이후 3~4년간 원사를 생산해도 사갈 수 있는 다운스트림 업체가 없었고, 건실한 섬유회사들이 연속적으로 부도 사태를 맞는 상황은 양적 드라이브와 설비증설의 시대가 저물었음을 예고했다.
도레이새한은 섬유 사업의 고도화만이 시대적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이라 판단하고 설비개조와 신제품 개발에 착수함과 동시에 대구, 경북시장을 부흥시키고 세계 직물업계에서의 위상을 되찾자는 취지로 2006년 12월 대구, 경북 소재의 14개 직·편물업체들과 국내 최초의 협의체인 ‘대동(大東) 클러스터’를 구성했다.
2007년 6월부터 섬유산업 스트림 간 기술개발 협력사업으로 고감성 원단개발 연구를 진행했다. 이는 2006년 지식경제부 산하 부품소재산업진흥연구원(현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이 지원하는 국책과제 사업의 일환이었다. 도레이새한 외 5개 기관이 함께 참여해 직방형 초극세 특수단면사를 이용한 고감성 파일류의 제품개발을 목표로 2007년 6월부터 2년에 걸쳐 정부지원금 16억 원이 투입된 대형 프로젝트였다.
도레이새한은 2005년 7월 분섬사 개발을 시작한 후 2006년 8월에 개발을 완료하고 시장에 진출했다. 분섬사 전용라인을 증설하지 않고 일반 라인에서 퀜칭(Quenching)개조 및 테스트를 통해 고품질의 제품을 확보하여 원가절감과 신제품 개발을 동시에 해낸 것이다.
원사의 원료가 되는 중합 부문의 고도화는 연중설비의 끊임없는 로드업 달성으로 원가를 절감하고 배치라인에서 필름, 원사 및 부직포용의 특품 칩을 개발하는 것으로 이뤄졌다. 도레이새한은 국내에서 달성된 적이 없는 로드업 프로세스를 자력으로 수행해 냄으로써 설비개조 및 운용 과정에서 독특한 노하우를 취득하는 성과를 올렸고 연간수억 원의 원가를 절감할 수 있었다.

아시아 1위의 스펀본드 부직포

부직포 제품은 위생재, 농업용, 산업용에 이르기까지 용도가 다양해지고 수요도 늘어갔다. 2000년 초부터 글로벌스펀본드 부직포 메이커들이 아시아권의 위생재 수요증가를 예상하고 집중공략하기 시작했으며 아시아 메이커들도 설비증설 대열에 합류했다. 또한 종이기저귀용 소재도 PP 스펀본드 부직포로 대체가 진행되어 수출용 PP제품군으로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PP-2호기부터는 위생재 용도의 제품군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IMF체제 하에서 고가의 직물을 부직포로 대체하는 등 생활용 및 위생재 시장의 수요확대에 대응하기 위해 1998년 연산 6,000톤의 위생재 전용라인 PP-3호기를 증설하는 동시에 아시아 최초로 SMS(Spunbond Meltblown Spunbond)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2000년 12월 전체 650억 원 규모였던 국내시장에서 1위로 올라선 도레이새한은 세계적 기업인 P&G와 유니참(Unicharm)에 대한 공급이 과제로 남아 있었다. 한국과 일본의 P&G와는 순차적으로 직거래가 성사되었는데, P&G의 구매정책이 지역별 구매에서 본사 일괄 지명정책으로 바뀌었고, 2000년 P&G의 자체 평가심사에서 아시아지역 공급 메이커로 미쓰이화학이 선정됐다. 도레이새한은 미쓰이화학을 통한 간접판매로 P&G와 거래를 하게 됐지만 꾸준한 품질향상 노력으로 2008년에 직거래로 전환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 과정에서 2001년 9월 아시아 최초로 저중량 SMMS 친수(親水)제품을 개발했으며, 2001년 12월부터는 연산 1만 톤의 PP-4호기 증설로 SMMS방식의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2003년 세계시장의 PP 스펀본드 부직포 생산량은 880만톤으로 2000년 대비 약 30% 증가했다. 국내 유아용 기저귀 시장도 2005년에는 보급률이 80% 수준을 넘어섰으며, 노령인구의 증가로 성인용 시장도 빠르게 신장됐다. PP스펀본드 부직포의 사용범위가 확대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일본뿐 아니라 동남아 시장까지 퍼져갔다. 거대한 세계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도레이새한은 한발 앞서 투자하고 신제품을 개발함으로써 기회를 선점하고자 했다. 2002년 10월, PP-4호기의 개조를 마무리하며 SSMMS(Spunbond Spunbond Meltblown Meltblown Spunbond) 타입의 다층 설비를 아시아 최초로 가동했으며 PP-5호기의 증설을 결정했다. 연산 1만 4,000톤 규모의 PP-5호기는 2003년 12월에 가동, 아시아 최초로 복합방사를 적용했다. 선행투자가 이루어진 PP-5호기의 가동으로 총 연산 4만 9,000톤이라는 국내 최대 규모의 생산능력을 갖추고 도레이새한은 명실상부한 아시아 1위로 자리매김했다. 2005년 3월에는 그간의 생산기술 노하우가 집약된 초경량 부직포 고속생산기술 관련 특허를 따내며 NT(New Technology) 인증 마크를 획득했다.

PP 스펀본드 부직포 생산라인

중국 대륙에 디딘 첫발, 도레이폴리텍난통

스펀본드 부직포 사업은 2005년 12월 매출 1,000억 원을 넘기며 엄청난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영업이익이 한 자릿 수로 내려앉아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아시아 최초로 SMS공법을 도입한 도레이새한이 주도해온 SMS시장에 경쟁업체들이 뛰어들면서 가격이 하락했다. 2005년 아시아 시장의 PP 스펀본드 부직포 수요는 13만 톤에 불과했지만, 전체 생산능력은 23만 톤으로 수요보다 공급이 급격히 늘어나며 가격인하를 불러왔다.
도레이새한은 도레이의 선진 생산 관리기술을 접목해 한층 더 체계화된 품질관리 시스템을 갖추고, 시설 재정비로 가격경쟁력을 강화했다. 내수 부문 시장점유율을 유지하기 위해 2005년 구미 1공단 부지에 자회사인 구미스펀테크를 설립하여 2007년부터는 이익률을 회복할 수 있었다. 또한 2001년 동남아 5개국 합계가 600톤에 불과했던 수출량이 시장개척에 만전을 기한 영업의 노고에 힘입어 2005년에는 무려 10배인 6,000톤으로 성장하는 발군의 성과를 거뒀다.
2004년부터 중국 시장의 부직포 사업 가능성 유무를 타진하고자 TF팀을 꾸리고 있었던 도레이새한은 2005년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해외공장 투자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중국 시장은 2000년 이후 매년 30%의 성장세를 구가하고 있었지만, 중국 내의 부직포 생산업체들은 품질 수준이 낮은 범용제품만 생산하고 있어 고품질 제품 수요는 해외 수입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도레이새한은 2003년부터 세계적인 부직포 관련 전시회에 참가하며 세계 스펀본드 부직포 사업의 흐름과 중국시장 동향을 꼼꼼히 점검했다. 2005년부터는 도레이새한의 단독 부스를 내고 중국 진출을 전제로 거래선과의 활발한 상담을 추진했다. 차후 중국 시장에 대한 본격적인 판매 활동을 추진한 결과 2005년 4,000톤 수출물량에서 2007년 7,000톤으로 확대됐다.
중국 현지 사업화 의지를 굳힌 도레이새한에 기회가 찾아왔다. 일본 유니참에서 중국 현지 공급을 요청했던 것이다. 당시 중국 시장의 판매가격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으나 수입관세나 운반비 등 제반 비용이 수익성 저하요인이 되고 있었다. 따라서 현지 생산의 타당성이 수면 위로 부상하며 중국 TF팀의 행보가 더욱 구체적인 양상을 띠었다.
2006년 11월 중국 스펀본드 부직포 사업 투자가 결정됐다. 12월 TPN(Toray Polytech (Nantong) Co., Ltd.) 법인설립 인가가 떨어지면서 마침내 스펀본드 부직포 사업의 글로벌 대장정이 시작됐다.

2004.05 PP-5호기 준공식

P O W E R  I N T E R V I E W

준비하고 기다리면 기회는 온다!

박서진 SB사업본부장 전무

처음 제일합섬 시절의 경산공장에서 조그마한 규모의 설비 하나로 시작되었던 스펀본드 사업은 이후 구미사업장으로 설비를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산업용, 농업용 위주로 PET스펀본드를 생산해오다가, PP 스펀본드로 확대하고 PP-2호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위생재를 만들어 냈습니다. 스펀본드 사업은 성장을 계속해서 현재는 가장 성공한 사업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당시 다른 회사에서는 구상도 하지 못했던 해외 진출을 과감하게 시도했던 것이 성공의 단초였습니다 . 2006년 중국 난통에 법인을 설립하고 2007년에 가동을 시작했는데, 그러는 동안 베이징 올림픽 등으로 중국의 소비문화가 변하면 서 초기의 중국시장 진입장벽을 극복하고 스펀본드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했고 이후 성장세를 계속 이어오고 있습니다.
중국 투자를 결정할 때만 해도 시장을 잘 몰랐지만, 중국의 인구와 출생아 수를 키 포인트로 해서 경제성장률과 1인당 소득을 보고 진출 시점을 판단했던 것이 제대로 적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