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섬유사업으로 태어나 첨단소재로 거듭나다(1972~1998)
제1절. 제일합섬의 탄생과 성장

2. 위기와 혁신의 변곡점, 그리고 새로운 탄생

1992년 창립 20주년을 맞은 제일합섬은 종합화학 메이커로서 제2의 도약을 꿈꾸며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조직을 근원적으로 변화시키는 혁신경영을 주창했다. 또한 1993년 신경영을 선포하고 양적으로 키워오던 사업구조에서 질적 성장 추구로 전략을 바꾼 삼성그룹의 혁신 운동과도 맥이 닿아 있었다.
삼성은 이 시기를 전후해 각 기업의 독자적 경쟁력과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계열사 분리를 단행했다. 1991년 신세계백화점과 한솔그룹을, 1993년에는 제일제당을 분리했고, 1995년 7월에는 제일합섬을 분리했다.

새로운 출범과 함께 다가온 시련

  • 1997.04 새한그룹 노사화합 및 CI 선포식(경향신문 기사)

  • 현재 도레이첨단소재 구미 3공장 건설 前 부지

삼성그룹에서 공식적으로 분리된 제일합섬은 1995년 7월 대구 경북대학교에서 ‘新제일합섬’ 발진식을 열었다. 분리될 당시 흑자 기조를 지키던 제일합섬 임직원은 새로운 출범에 대한 각오를 다지며 1998년까지 매출 1조 원 달성을 천명하며 세계 10대 폴리에스터 기업으로의 성장과 2006년 세계 초일류 기업 진입을 이루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각오와 달리 6개월여 동안 정식 사명도 정하지 못한 채 경영을 이어가는 불안한 과도기를 보내야 했다.
1997년 2월 새한그룹으로 편입된 제일합섬은 사명을 주식회사 새한으로 변경하고 새한그룹의 일원으로 정식 출범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97년 당시 폴리에스터 업계에서 세계적인 생산능력을 자랑하던 새한은 섬유, 필름증설에 1조 원을 투자하는 등 대대적으로 설비투자를 늘려갔다. 반면 새한그룹은 구조조정을 등한시한 채 당시 대기업들의 관행을 그대로 답습하며 주력 부문과 관계없는 업종의 문어발식 계열사를 그대로 끌고 가는 등 외형성장에 치중한 결과 금융비용이 눈덩이처럼 늘어나고 있었다. 이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화섬경기의 불황이 지속되면서 그룹의 앞날에 먹구름이 드리워지며 점차 위기로 빠져들었다.
더구나 1997년 외환위기를 맞은 정부가 그해 11월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 금리가 폭등하자 달러 환율은 2,000원대를 돌파했고 이어지는 외환거래 정지로 많은 기업들이 파산하는 등 경제위기를 맞았다.
무리한 몸집 불리기로 자금난을 겪고 있던 새한은 자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1998년 6월경 합작사인 도레이에 구미2공장(현재 구미 3공장)의 베이스 필름사업과 관련한 합작회사를 설립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미 폴리에스터 베이스 필름 부문에서 세계 1위의 경쟁력을 지니고 있던 도레이는 일본과 동남아시아, 미국과 유럽을 아우르며 전 세계시장을 주도하려는 포부가 컸다. 그일환으로 잠재성장 가능성이 큰 한국을 베이스 필름의 주요 거점으로 성장시킨다면 아시아 시장을 도레이의 글로벌 오퍼레이션 체제 하에 하나로 묶어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입지를 더욱 탄탄하게 해 줄 터였다. 따라서 새한과의 합작은 도레이그룹이 전 세계 필름시장의 주도권을 쥐는 차원에서도 더없이 중요하고 필요한 기회였다
새한의 제안을 받은 도레이는 1998년 8월에 긍정적인 답을 보내왔다. 이에 새한은 ‘TS(도레이새한) 프로젝트’ 체제를 발족했는데 당시 새한그룹 부회장이자 새한의 대표이사였던 한형수 부회장이 TF팀의 리더를 맡았고 이영관 전무(현재 도레이첨단소재 회장)가 서브 리더로 선정되어 11월 TS 프로젝트 킥오프 미팅을 시작으로 합작회사 설립 프로젝트는 급속도로 진전됐다. 킥오프 미팅 이후 12월에는 도레이로부터 실사단이 파견됐다. 무려 30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실사단은 새한 본사와 구미공장을 방문해 열흘이 넘도록 실사를 이어갔다. 재무와 법무는 물론 인사와 노무, 원사, 부직포, 필름라인, 중합라인에 이르는 구미 2공장(현재 구미 3공장)의 생산 현장까지 꼼꼼하게 체크했다.
그러나 정작 투자의향서를 체결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99년 6월이 되어서야 협의가 이루어진 이유는 새한이 처음 제시했던 규모보다 더 확대된 매각이 전개됐기 때문이었다. 도레이는 새한과의 합작 기회를 전 세계 필름시장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더없이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당시 도레이가 연간 생산하는 20만 톤의 필름에 새한이 생산하는 10만 톤의 필름이 더해진다면 120만 톤인전 세계 필름 총생산량의 4분의 1을 차지해 세계 시장을 주도하기에 충분한 물량을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또한 필름사업의 시너지 효과를 위해 원료를 생산하는 중합라인까지 인수해야 하였으므로 새한 1공장(현재 구미 1공장)이 지닌 일산 163톤 규모의 중합 배치라인을 놓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도레이는 접근방식에 신중을 기하는 입장이어서 한국시장에 대한 타진은 물론 전체 베이스 필름 사업에 대한 전망과 수익성을 동시에 잡아야 하고, 인수의향서(LOI)에 인수에 관한 모든 조항을 빠짐없이 세세하게 담아야 했으므로 그 의사결정은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새한은 새한대로 급박한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구미사업장 매각에 따른 매각대금을 놓고 신중하지 않을 수 없어 두 회사는 치열하고 팽팽한 의견대립으로 시간이 흘렀고 많은 우여곡절도 겪었다.
최종 합작 범위는 새한의 필름 사업을 중심으로 한 3개 사업 부문으로 좁혀졌다. 도레이는 구미 1공장과 2공장의 필름라인 전체는 물론 원료 부문인 중합라인까지 포함하기로 합작 조건을 내세웠다. 거기에 구미 2공장(현재 구미 3공장) 내의 부직포와 원사를 합작법인에 매각하는 형식을 요구했다. 자금난에 시달리던 새한의 입장에서도 합작 조건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애초 장부가격이 거의 그대로 수용된 액수인 5,903억 원으로 결정된 것은 당시 합병이나 매각대상에 오른 회사들이 평가액의 3분의 1도 못 미치는 가격에 넘기던 상황과 비교하면 대단히 성공적인 매각 케이스였다.

한·일 경제협력의 모델, 도레이새한으로 거듭나다

1999년 9월 도레이와 새한 간의 합작 투자계약이 체결됐다. 새로 설립될 회사의 이름은 도레이와 새한의 이름을 딴 도레이새한(Toray Saehan Inc.)으로 결정했다. 합작회사 설립은 빠른 속도로 이루어져 10월 양사의 6:4 지분율에 따라 자본금 50억 원이 납입됐다. 11월 자산양수도 계약이 성사됐고, 11월 2,950억 원이 증자되어 도레이새한의 총 자본금은 3,000억 원으로 늘어났다. 또한 계약에 따라 필름, 원사, 부직포 등 자산양수도가 실행됐다. 또한, 한·일 경제협력기금의 일부로 일본국제협력은행(JBIC)의 1억 8,500만 달러, 한국산업은행을 통한 88억 엔의 외자를 차입함으로써 마침내 총 자산규모 6,000억 원, 부채비율 104%의 우량기업이 탄생했다.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들이 부채규모 200%를 맞추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점에 비추어 보면 도레이새한은 탄탄한 재정적기반 위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당시 화섬업계에서 사상 최대 규모였던 외자도입 성공은 국가적 차원의 외자유치 노력 과정에서 성사된 한·일 정상회담의 결실이기도 했다.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과 일본의 오부치 게이조 총리의 회동으로 이뤄진 한·일 정상회담에서는 ‘21세기를 향한 한·일 파트너십 구축’ 정신에 의거해 한·일 민간합동 투자촉진협의회 구성과 함께 한·일 경제협력기금의 조성이 성사되었다. 한·일 경협기금의 일부를 차입한 도레이새한의 설립은 곧 한·일 투자촉진을 도모하자는 국가적 취지에 의한 최초의 비즈니스 동맹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1999.06 새한-도레이간 합작법인 설립투자의향서 체결식

글로벌 화학소재기업, 도레이

도레이그룹은 1926년에 설립되어 일본 및 해외에 270여 개사를 경영하는 글로벌 화학소재기업이다. 세계적인 공급망을 지닌 필름 1위 메이커로 100여 년의 역사를 이어온 도레이는 첨단재료로 세계 최고를 목표로 하고 있다 ‘.우리는 새로운 가치 창조를 통해 사회에 공헌한다’는 기업이념과 ‘소재에는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다’는 R&D 철학을 지닌 도레이는 삼성과의 인연은 물론 제일합섬 때부터 오랜동반관계를 이어왔다. 1963년 한국에 나일론 제조기술 공여를 시작으로 1969년 제일모직 경산공장에 T/R 방직 생산기술을 공여한 바 있었던 도레이는 1972년 폴리에스터원면기술을 제공하면서 제일합섬 설립에 28.6%의 지분으로 참여해 우리나라 화섬산업의 초기 발전에 일조했다 .
1995년에는 삼성그룹과 합작으로 STECO와 STEMCO를 설립했고, 1999년에는 새한과 합작하여 도레이새한(현재 도레이첨단소재)을, 2010년에는 도레이배터리세퍼레이터필름한국을 설립했다. 특히, 도레이첨단소재는 도레이와 투자를 확대하며 2011년 한국의 탄소섬유 사업에 진출했고, 2012년 수처리 사업, 2013년 슈퍼 엔지니어링 플라스틱(PPS) 사업에 진출했다. 2014년에는 도레이케미칼을 인수하여 안정적 생산기반을 확보했고(이후 2019년 도레이첨단소재에 합병), 2016년 도레이첨단소재 구미 4공장(현재 구미 5공장)을 기공하는 등 한국에 지속적인 투자를 이어오고 있다.
도레이는 단기적 이윤을 추구하지 않고 장기적 관점에서 한국의 산업진흥과 수출확대, 기술수준 향상에 기여하고자 노력해왔다. 합작 사업 운영에서는 한·일 최고 경영진들이 장기간에 걸쳐 우호관계와 신뢰관계를 유지하고, 우수한 한국인 경영자를 지명하여 한국인의 주체적인 경영에 위임하는 방침을 고수했다. 노동조합에 대해서는 경영정보를 적기에 알림으로써 신뢰관계를 구축하고자 노력했다. 도레이첨단소재가 오늘날 소재기업으로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를 향해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일본 도레이와의 긴밀한 협력과 기업문화의 성공적 융합이 바탕이 되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